쓰가루 노부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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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노부타케는 1574년 쓰가루 다메노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센고쿠 시대 무장이다. 아버지의 명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교토에서 외교 활동을 펼치며 쓰가루 가문의 후계자로서 활동했으나, 1607년 교토에서 병사했다. 그의 사후, 동생 노부히라와 아들 구마치요를 옹립하는 세력 간의 갈등으로 쓰가루 소동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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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노부타케 | |
---|---|
기본 정보 | |
씨명 | 쓰가루 씨 |
이름 | 쓰가루 노부타케 |
이명 | 헤이타로 (통칭), 미야우치 |
관위 | 궁내소보, 궁내대보, 좌마두 |
막부 | 에도 막부 |
씨족 | 쓰가루 씨 |
부모 | 쓰가루 다메노부 |
형제 | 노부타케, 노부카타, 노부히라, 도미코, 가네코 모리히사 실 |
배우자 | 아키타 사네스에 딸 마쓰마에 요시히로 딸 |
자녀 | 구마치요, 벤치요, 남자 |
생애 | |
출생 | 덴쇼 2년 6월 10일 (1574년6월 28일) |
사망 | 게이초 12년 10월 13일 (1607년12월 2일) |
관직 | |
관위 | 궁내소보, 궁내대보, 좌마두 |
2. 생애
1574년(덴쇼 2년), 무쓰국 쓰가루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 쓰가루 다메노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에보시 오야를 맡았다. 정실은 아키타 사네스에의 딸이며, 계실은 마쓰마에 요시히로의 딸이다.
아버지의 명으로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고쇼(小姓)로 섬겼지만,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시다 미쓰나리)에 속했다. 한편, 아버지 다메노부는 동군으로서 오가키 성 포위에 참전했다.[2] 이 행동은 사나다 가문이나 구키 가문 등과 같이 "가문 분열에 의한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면회하거나 고쇼에 참내하여 관위를 수여받는 등, 다메노부의 정식 후계자로서 행동했다. 서군 패배 후, 미쓰나리의 차남 시게나리 등을 와카사국으로부터의 에조 무역 루트로 쓰가루로 도망치게 하고, 노부타케 본인은 교토·오사카에 머물면서 쓰가루 가문의 외교 요원으로서 활동했던 듯하며, 공가들과 활발한 교류가 공가 측의 일기에 남아있다(니시노토인 도키요시 '도키요쿄키'). 아버지와는 별도로 직신단을 가지고, 쓰가루 다케히로, 쓰가루 다케토모 등 측근을 중심으로 번정과 외교에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동생 노부히라(다메노부 3남)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명에 의해 기리시탄이 되었다.
1602년(게이초 7년), 아버지 다메노부가 실수로 손자 구마치요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자, 이 일로 노부타케는 아이를 돌려달라고 아버지와 대립했다. 그 때, 사자로 나선 가신 덴도 모의 부주의를 나무라고 일족을 처형했다. 이에 분노한 덴도 일족이 노부타케에게 반항하여 성내에서 난투, 노부타케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치는 일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덴도 일족은 토벌되었다(덴도 사건). 이 사건으로 덴도 측이 쓰가루 가문의 거성 호리코시 성의 혼마루까지 손쉽게 돌입에 성공한 사실로 인해, 누마타 스케미쓰의 의견을 채택한 신성·다카오카 성(히로사키 성)으로의 본거지 이전이 빨라졌다고 한다.
1607년(게이초 12년), 교토에서 병을 얻었다. 같은 무렵 쓰가루에서 같은 병을 앓은 다메노부가 노부히라를 데리고 교토까지 문병을 갔다.[3] 같은 해 10월 13일(2월이라고도 함) 사망했다. 향년 34세로 알려져 있다. 니시노토인 도키요시는 사망 후 수년 동안 자신의 보리사에서 노부타케의 법요를 치렀다고 한다.
노부타케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대를 물려받지 못했고, 다메노부의 뒤는 동생 노부히라가 잇게 되었다. 그러나 노부히라 파와 노부타케의 유아 구마치요(오구마)를 옹립하는 다케히로 등 구 노부타케 직신단 파벌과 가신단이 분열되어 오이에 소동(쓰가루 소동)이 일어났다.
2. 1.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이시다 미쓰나리가 쓰가루 노부타케의 후견인이었다. 아버지 다메노부의 명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고쇼로 오사카성에서 일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패배하자 미쓰나리의 둘째 아들 시게나리를 데리고 쓰가루로 돌아왔다. 아버지 다메노부는 동군 소속으로 오가키성 포위전 등에 참여하였으나, 아들의 후견인이자 히로사키 번의 영지 획득에 힘을 써준 미쓰나리의 은혜를 갚고자 시게나리를 적극 보호하였다. 다메노부의 이러한 행동은 동군과 서군 각각에 양다리를 걸쳐 살아남기 위한 책략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4]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노부타케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행보를 보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천황으로부터 관위를 받았으며, 아버지를 대신해 번의 통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노부타케는 교토에 남아 조정의 귀족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4] 쓰가루씨의 외교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 쓰가루 다케히로, 쓰가루 다케토모 등의 측근 신하 집단이 그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동생인 노부히라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트교도가 되었다.[4]
2. 2. 덴도 사건
1600년, 맏아들 구마치요(熊千代일본어)가 태어났다. 구마치요는 아버지 다메노부가 데리고 있었는데, 1602년 다메노부가 실수로 구마치요의 얼굴에 상처를 내자, 노부타케는 아이를 돌려달라며 아버지와 대립하였다. 이때 사자로 갔던 가신 덴도(天童일본어)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그 일족이 처형당했고, 이에 덴도 가문이 분노하여 노부타케에게 반항하며 호리고에 성 안으로 난입하였다. 노부타케는 목숨만 겨우 건져 도망쳤으나 결국 덴도 가문은 토벌당하였다. 이를 덴도 사건이라고 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히로사키성으로 본거지를 옮기는 작업이 긴급하게 진행되었다.2. 3. 사망과 쓰가루 소동
1607년, 교토에 있던 중 병이 났고, 같은 시기 역시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다메노부가 노부히라를 데리고 교토까지 병문안을 왔으나, 결국 10월 13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버지도 두 달 뒤에 사망하였다. 노부타케는 아버지보다 일찍,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가독 계승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번주 자리를 이은 동생 노부히라를 지지하는 세력과 노부타케의 아들 구마치요를 옹립한 쓰가루 다케히로 등의 노부타케 가신단 세력이 대립하는 '쓰가루 소동'이 일어났다. 쓰가루 다케히로는 막부에 구마치요의 계승 정당성을 주장하며 소송을 냈지만, 1609년, 막부에서 노부히라의 적통을 인정함으로써 소동은 끝이 났다.참조
[1]
문서
異説として慶長11年(1606年)12月20日没とも
[2]
문서
実際に現地で参戦し指揮を執っていたのは三男の津軽信枚|信枚。合戦を描いた屏風絵などで少数ながらも津軽勢の本戦参加が確認できる、とされている。
[3]
문서
一説には信建の治療をしている名医に自分も診てもらいたかったからだとされる。
[4]
서적
時慶卿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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